성매매와 성노동 사이
그의 사진 수백점이 현재 뉴욕의 성 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내가 '배운 여자'이기 때문에 나는 저학력의, 빈곤층 남성들의 젠더 감수성을 비판할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어째서 '젠더'가 계급을 형성하고 여기에서 착취와 차별과 억압이 일어나고 있음은 은폐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어째서 젠더의 계급-또는 여성성의 계급('창녀'와 '모성'의 스펙트럼 같은)은 계급의 문제로 논의되지 않는가? 블랙넛이나 정중식처럼, 소위 '루저' 감성의 혹은 실제로 남성성 경쟁에서 상대적 약자인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착취나 비하, 혐오 발언을 할 때 이것이 논란이 되면 왜 그들보다 계급이 높은 여성을 기어이 '가정'하고, 여성이 반드시 약자는 아니라는 아무말 결론을 이끌어내는가?
비록 과정의 미숙함은 있었고, 아직도 비판의 여지가 남아있는 부분은 있지만, #나는창녀다 해시태그는 '개념녀' 찬양과 '김치녀' 사냥에 질식하기 직전이었던 한국 여성들이 성녀나 창녀나 똑같이 혐오당하는 여성들이라는 걸 깨달았음을 보여준다. 각자 다른 경험을 고백했지만 여성들이 보내는 메시지의 핵심은 명확하다. 분할하지 말라. 감히 통치하려 들지 말라. 누군가를 창녀라고 규정하기 전에, 창녀라고 규정된 존재를 멸시하기 전에, 여성들에게 성녀-창녀 이분법을 들이대는 그 오만함부터 돌아보라.
사건 그 자체보다 이를 둘러싼 세상의 반응을 보면서 이것은 결코 한 정신병자의 난동으로 축소할 문제가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이 문제로 '남자친구'나 '남편'과 다투었다는 연락이 어제부터 끊이질 않는다. 참담하다. 한 생명의 죽음과, 성별이 곧 과녁인 생활을 살아가는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마저 "잠재적 범죄자로 몰리는 내 억울함"이 우선인 언어들을 보며 나는 솔직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몰라도 되는 권력은 너무나 의연하고 뻔뻔스러워서, 백 번 눈높이를 맞춰서 설명하고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만 눈을 돌리고 귀를 열고 공부해보면 알 수 있는 건에 대해서 끊임없이 상대에게 팔짱을 끼고 "내 생각은 이런데 날 설득시켜봐"라는 태도를 취한다.
PD수첩은 이제 어떤 이에게는 면죄부가 됐다. 아버지의 짐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서 고달픈 '한국 남성'의 삶을 스스로 연민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힘듦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이해해줄 생각이 없는 '한국 여성'들을 조금 더 맘 편히 비난할 수 있게 됐다. 그러는 동안 오늘도 대부분의 한국 여성들은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같은 차별을 겪어야 한다.